[소상공인 비금융지원 기획기사 ②]

영등포구 보라매 역 인근, 한적한 골목 한편에 자리한 ‘도토리소년’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작은 소우주가 펼쳐집니다. 구석구석 도토리 소품들로 가득한 공간, 초록의 식물이 드리워진 모퉁이에서는 옛 TV에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흐르고 있습니다. 카페 작업 공간을 둘러싼 다양한 빈티지 소품. 모든 물건에는 사연이 담겨 있습니다.
“여기 있는 물건 대부분이 카페를 위해 산 게 아니에요. 어렸을 때부터 제가 모아온 것들, 손님들이 주신 선물들이죠.”
2020년 1월, 김영미 대표는 이곳에서 카페 문을 열었습니다. 영화 미술팀에서 일하며 지친 몸과 마음을 쉬게 하고 싶었고, 병든 반려견과 함께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도자기 공방을 시작했습니다. 갑작스레 반려견을 떠나보내며, 몸과 마음이 완전히 지친 상황에 우연히 발견한 이 공간에서 새로운 시작을 꿈꿨습니다.
“10월이었어요. 문이 다 열려 있고 바람이 이렇게 부는 거예요. 햇빛이 따사로이 들어와서 그냥 ‘여기로 하자’ 했죠.”
초보 창업자의 시행착오
하지만 카페 운영은 녹록지 않았습니다. 개업하자마자 코로나가 터졌고, 설상가상으로 이 골목은 유동인구가 극히 적은 곳이었습니다.
“코로나라 사람이 없는 건지, 원래 사람이 없는 건지 모르겠더라고요. 첫 자영업이어서 그냥 ‘원래 장사가 이런가 보다’ 하고 버텼죠.”
상권 분석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시작한 카페. 10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 테이블은 4개뿐. 회전율도 낮고 점심시간 외에는 한산한 시간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월 매출은 말하기 조차 부끄러운 수준이었습니다.
“세무서 가면 매출이 너무 작아서 ‘혼자 하라’고 받아주지도 않았어요.”
2023년에는 더 큰 시련이 찾아왔습니다. 근처에 카페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입니다. 같은 골목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버티고 있는 이웃 가게들이지만, 작은 카페인 도토리소년에게는 부담스러운 변화였습니다.
간판도 문제였습니다. 처음에는 야심차게 도토리소년 로고만 달았다가, 나중에야 ‘카페’라는 글자를 추가했습니다. 그럼에도 카페는 여전히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큰 창에서 들어오는 볕이 오히려 카페 내부를 어둡게 보이게 했습니다. “여긴 왜 맨날 불이 꺼져 있냐”는 주위 분들의 말에 좌절감 마저 들었습니다.
“제가 너무 나이브했죠. ‘커피 맛만 있으면 찾아오겠지’ 했는데, 이 동네는 그런 게 안 통하더라고요.”

성실함으로 버틴 시간들
그럼에도 김 대표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문을 열고, 같은 시간에 문을 닫았습니다. 코로나 때도, 손님이 없어도, 묵묵히 자리를 지켰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매일 이 자리에 있는 것밖에 없었어요. 버티는 것 밖에요.”
새벽 5시에 일어나 빵을 굽고, 밤 12시가 넘어서야 집에 가는 날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영업시간도 9시까지 늘렸고, 쉬는 날도 줄여가며 지금껏 버텨왔습니다.
“손님이 오지 않으면 여기서 계절이 변하는 걸 보면서 위안을 삼았어요. 4월에 벚꽃이 피고, 눈이 내리고… 그런 것들을 보면서요.”
그렇게 6년째 카페를 지켜온 김 대표. 손님들은 떠나고 또 새로 오고, 어떤 이들은 결혼하고 이사 가면서도 “사장님 언제까지나 있어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냉정했습니다.
“다들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데 저는 혼자 여기 정체돼 있는 것 같았어요. 매일 12시간씩 일하는데 시간 대비 수익이 너무 낮으니까요.”

작은 지원이 만든 큰 변화
좌절의 순간, 우연한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인근에서 장사하는 지인이 ‘깨비상점’ 사업을 소개해준 것입니다.
“그전에 하나 파워 온 스토어 간판지원 사업에 떨어져서 충격이 컸었어요. 간판이 너무 간절했거든요. 자다가도 일어나서는 ‘이것만 있으면 손님이 좀 오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깨비상점은 KB증권과 함께만드는세상이 영등포구 기창업자를 대상으로 진행하는 사업입니다. 업체당 300만원 상당의 기자재와 마케팅 비용을 지원합니다.
이번 사업에서 김 대표는 간판 대신 그라인더를 선택했습니다. 카페 운영에 필수적인 아이템이고, 커피를 아는 손님들에게 전문성을 보여줄 수 있는 위시리스트 중 1위 였기 때문입니다.
“전에는 작은 그라인더로 100g 갈 때마다 다섯 번씩 쉬어야 했어요. 손님들도 힘들어하셨죠. 근데 이제는 한 번에 갈 수 있고, 맛도 디테일하게 조절할 수 있어요.”
새 그라인더가 들어온 날, 단골 손님들이 진심으로 축하해줬습니다.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에는 평소보다 많은 댓글이 달렸습니다.
“다른 사람들한테는 별거 아닐지 몰라도, 저한테 그 댓글이 너무 감사했어요. 같이 호응해 주고, 신이 났어요. 내가 여기서 헛일만 한 게 아니구나 싶었죠.”
그 후, 더 큰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깨비상점을 통해 간판 지원을 추가로 받게 된 것입니다.
“정말 천사가 내려왔나 싶었어요. 간판 교체는 가장 큰 소원이었거든요.”
최근 김 대표는 테이블 2개를 새로 바꿨습니다. 컵자국이 남는 낡은 테이블이 늘 마음에 걸렸는데, “누군가 나를 도와주려고 하는데 나도 투자를 해야지” 하는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

영등포 골목에서 다시 꿈꾸기
김 대표에게 깨비상점 지원은 장비 교체 이상의 의미였습니다.
“취약층은 아니지만, 영세한 자영업자는 어디서도 보호받지 못한다고 느꼈었어요. 얼마 전 근로장려금도 신청했는데, 작년에 비해 매출이 조금 올랐다고 못받는다는 거에요. 그런데 이렇게 누군가 나를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있구나, 나도 손 내밀 수 있는 곳이 있구나 싶었어요.”
새 간판이 달리면 어떻게 될까. 김 대표는 확신합니다.
“단골 손님들이 분명히 ‘사장님 너무 잘 됐어요. 간판 바뀌었어요?’ 하면서 기뻐해 줄 거예요. 제가 동정 마케팅을 펼쳐서인지, 손님들이 많이 걱정해 주시거든요.”
물론 유동인구가 적고 상권의 한계가 존재하기에, 간판 하나로 모든 게 해결될 수 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김 대표는 이제 이 공간에서 할 수 있는 일들을 다시 상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서 조금씩 변화를 만들어보려고 해요. 다양한 원두를 소개하고, 손님들한테 더 나은 커피를 내리고 싶어요. 그동안 못했던 것들을 하나씩 해볼 용기가 생긴 것 같아요.”
작고 다정한 가게의 꿈
김 대표가 꿈꾸는 가게입니다.
“저는 제가 내린 커피가 5천 원의 가치를 하고 있는지 늘 고민해요. 홍대에서 어렵게 지낼 때 5천 원 커피가 정말 비쌌거든요. 그래서 여기 오는 손님들한테도 5천 원이 절대 싸지 않다고 생각하고, 아늑한 공간에 맛있는 커피를 대접하고 싶어요.”
그라인더를 바꾼 후, 김 대표는 늦은 밤까지 공부했습니다. 날을 갈고, 분쇄도를 조정하고, 맛을 테스트하면서 최적의 커피를 찾아냈습니다.
“급하게 서둘러서 좋은 기계를 함부로 하고 싶지 않았어요. 어떻게 쓰는 게 제일 좋은지 알고 싶었죠.”
이름도 지었습니다. ‘흰둥이’. 새 식구가 된 그라인더를 볼 때마다 뿌듯해집니다.
카페를 시작한 지 6년, 김 대표는 오늘도 새벽 5시에 일어나 빵을 굽고, 커피를 내립니다. 손님이 없는 날에도, 비가 오는 날에도, 성실하게 이 자리를 지킵니다.
“앞으로 잘될 거라는 확신은 없어요. 하지만 이제는 조금 희망이 보여요. 간판이 생기고, 손님들이 응원해주고, 나를 도와주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요.”
계산대 옆 사진에는 긴 시간 함께했던 반려견이 따뜻하게 웃고 있습니다. 그 옆에 놓인 새 그라인더 ‘흰둥이’도 오늘 하루를 함께할 준비를 마쳤습니다. 작지만 다정한 이 공간에서, 김영미 대표의 새로운 시작이 천천히, 그러나 단단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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