숫자를 너머 사람을 향하는 길, [함께온기금이 묻는 것들 1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특집] 함께온기금이 묻는 것들 1편 - “당신에게 왜 이 돈이 필요한가요?” 1 함께온기금이 묻는 것들 이미지](https://www.bss.or.kr/wp-content/uploads/2026/04/1편_사람인가-숫자인가-이미지_sm.jpg)
미성년 자녀 둘을 둔 한부모 가장입니다. 평일에는 회사를 다니고, 주말에는 녹즙·우유 배달을 합니다. 이혼 후 5년 동안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급여 통장이 지급정지됐습니다. 한 번도 함께 살아본 적 없는 생부가 사망하면서 남긴 빚이 자녀에게 승계된 것이었습니다. 비슷한 시기 장마로 살던 반지하 집이 침수됐습니다. 자녀들과 함께 한부모보호시설에 입소했고, 모녀 시설 특성상 큰아들은 지인 집에서 따로 지내야 했습니다.
이듬해 LH 임대주택 대상자로 선정됐습니다. 그러나 본인부담금을 마련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개인회생 절차가 진행 중이라 어디에서도 대출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대출 신청서 어딘가에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어떻게든 제가 바로서야 아이들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은 대출을 받을 수 있을까요?
거절의 여정
이 신청자는 함께온기금을 찾아오기 전, 다른 곳들을 먼저 거쳤습니다.
은행에 갔습니다. 신용점수, 소득, 부채 규모, 회생 진행 여부를 묻는 서류를 작성했고,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저축은행에 갔습니다. 비슷한 서류를 다시 썼고, 비슷한 답을 들었습니다. 햇살론을 비롯한 정책금융 창구도 찾았습니다. ‘개인회생 절차 진행 중’이라는 한 줄이 자격을 막았습니다.
가는 곳마다 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점수가 얼마인가, 소득이 얼마인가, 부채가 얼마인가. 그리고 어디서나 같은 답이 돌아왔습니다. ‘대출 불가’
거절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거절당한 사람이 다음에 찾아가는 곳에서는 훨씬 비싼 대가를 치뤄야 합니다. 연 10%를 넘는 금리, 때로는 20%를 넘는 금리로 말입니다. 돈이 가장 절박한 사람에게 가장 비싼 값이 매겨지는 구조입니다. 재기하려고 내는 이자가 재기를 점점 더 어렵게 만드는 일이 여기서 시작됩니다.
신청서에 한 질문을 더했습니다
함께온기금이 신청서에 더한 질문은 한 줄입니다.
“당신에게 왜 이 돈이 필요한가요?”
신용점수는 침수가 일어나기 전과 후를 구분하지 못합니다. 한 번도 살아본 적 없는 생부가 남긴 빚과 신청자 본인이 만든 빚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큰아들과 떨어져 지낸 시간이 한 사람을 어떻게 통과해갔는지 알지 못합니다.
숫자는 이 사람이 왜 여기까지 왔는지, 지금 무엇을 하려 하는지를 말해주지 않습니다. 사연을 묻기 시작하면, 이 모든 맥락이 수면 위로 올라옵니다. 같은 신청자이지만, 점수로만 볼 때와 사연 안에서 볼 때, 상환 가능성을 예측하는 관점과 방식이 달라집니다.
질문 하나가 만든 차이
한국과학기술원(KAIST) 경영공학부 연구팀과 함께 함께온기금의 심사 모형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제도권 금융과 사회적 금융의 심사 방식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비교해보는 실험을 했습니다.
기존의 심사가 정량 데이터를 중심으로 이뤄진다면, 사회적 금융의 심사는 사업의 취지라는 맥락을 함께 놓고 신청자의 사연을 같이 읽는 방식입니다. 이 차이를 확인해보기 위해 같은 신청서들을 두 가지 방식으로 읽어봤습니다.
첫 번째는 신용점수, 소득, 부채 같은 수치만 봤습니다. 두 번째는 함께온기금의 사업 취지를 맥락으로 두고, AI를 활용해 신청자의 사연까지 함께 읽었습니다. 부채가 어떤 경위로 생겼는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앞으로 무엇을 계획하는지를 읽는 방식입니다.
두 번째 방식에서 검토 가능한 건수가 약 7배로 늘었습니다. 우리가 주목한 것은 수치 자체보다 차이의 방향입니다. 신용점수와 소득 수치만으로 보던 자리에서, 사업의 취지와 사연의 맥락이 함께 놓이는 자리로 옮겨갔을 때, 같은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질문 하나가 추가됐을 뿐입니다. 그런데 같은 신청서에서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이 결과를 “더 정교한 분석으로 더 많은 사람을 승인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로 읽고 싶지는 않습니다. 사연은 분석의 대상이 아닙니다. 사연을 다시 점수로 환산하는 시스템을 만든다면, 그것은 또 다른 점수 시스템일 뿐입니다.
우리가 본 것은 한 가지입니다. 한 사람을 어디서 보느냐, 그 자리가 한 칸 옮겨지는 것만으로 같은 신청서에서 보이지 않던 사람이 보이기 시작한다는 사실입니다.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한 칸이지만, 누구에게는 거절과 승인의 차이입니다.
![[특집] 함께온기금이 묻는 것들 1편 - “당신에게 왜 이 돈이 필요한가요?” 2 GettyImages jv11459495](https://www.bss.or.kr/wp-content/uploads/2026/04/GettyImages-jv11459495.jpg)
듣는다는 것
서류에서 사연을 읽는 것은 시작입니다. 다음은 직접 만나 듣는 일입니다.
함께온기금의 심사는 합격과 불합격을 가르는 자리가 아닙니다. 신청자가 자기 상황을 처음부터 다시 정리해보는 자리이고, 심사역이 그 안에 함께 들어가는 자리입니다. 부채 구조를 어떻게 다시 짤 수 있는지, 활용할 수 있는 제도가 무엇인지, 다음 몇 달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같이 그려보는 시간입니다. 심사가 자연스럽게 상담이 되는 이유입니다.
사회연대은행이 22년간 7,286건, 728억 원을 지원하면서 평균 상환율 83.2%를 기록한 것은 더 정교한 평가 기술 때문이 아닙니다. 심사 과정에서 자신의 사정을 들어준 사람, 함께 계획을 짠 사람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는 마음. 그 관계가 상환을 이끄는 실질적인 힘이었습니다.
이 글의 맨 처음으로 돌아가 봅니다. 평일과 주말을 쪼개 일한 5년, 한 번도 함께 산 적 없는 사람의 빚, 잠긴 반지하, 큰 아들과 따로 지내야 했던 날들, 그리고 LH 임대주택의 자기부담금.
남의 이야기처럼 읽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는 특별히 불행한 사람에게 오는 것이 아닙니다. 갑작스러운 실직, 가족 한 명의 와병, 침수와 같이 예상치 못한 사건이 잠시 우리 삶의 안정을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사회연대은행은 23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연을 읽어왔습니다. 이 신청자만이 아니라, 같은 자리에 있는 수많은 사람의 신청서를 다르게 읽어왔습니다. 그리고 사연을 읽는 것이 시작일 뿐이라는 것도 알게 됐습니다.
다음에 우리가 한 일은 목소리를 듣는 일이었습니다.
(2편에서 계속)
글: 김세권(미래사업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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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온기금이 묻는 것들, 2편 “당신에게 진짜 필요한 최소 금액은 얼마입니까?”